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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를 읽다 [ 효에 대한 생각]

물수제비 2021. 10. 1. 19:19

고등학교 다닐 때쯤 돌아간 류영모, 철이 들어야 했던 때쯤 돌아간 함석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이름 정도 들었던 분들이었습니다. 

 

함석헌을 읽다가 자신의 스승 류영모를 말함에 궁금증 더해져 다시 그의 스승을 읽게 되었는데요....

그의 효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누고파 옮겨봅니다.

 

유교에서는 우(上)를 받든다는 것은 부모나 조상을 받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우를 하느님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유교가 태극에서 음양만 말하듯 그 윗자리인 무극(無極)을 잊은 것입니다. 유교가 활발히 발전하지 못한 것은 우주의 근원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제 가족만 알았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효를 잊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땅의 부모보다는 하느님 아버지가 먼저라야 합니다. 천명에 매달린 유교가 망천(忘天) 을 하여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유교가 맥을 쓰지 못합니다. 효도뿐 아니라 천도가 망하는 것도 처자식 때문입니다. 우주의 근본이요 생명의 근본인 얼을 추원(追遠)하고 사모해야 하는데 전향하여 제 여편네와 자식들을 거두어 먹이겠다는 욕심을 좇느라 그렇게 된 것입니다. 효도의 실상은 하느님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바로 아는 사람이라야 땅의 부모에게도 최선의 효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정성이 부모님을 향한 정성이 됩니다. 이 근본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 이 사회에는 자식들에게 설움 받는 어버이들이 많습니다.

류영모님이 살아 있었다면 이 세대를 보고 뭐라 한탄할까요?

 

 

왼쪽이 류영모, 오른쪽이 그의 제자  함석헌 이다

 

                                         

 

 

류영모(柳永模 1890년 3월 13일 ~ 1981년 2월 3일서울 출생)는 한국의 개신교 사상가이며 교육자, 철학자, 종교가이다. 호는 다석(多夕)이다. 조만식김교신 등과 같은 세대로, 함석헌김흥호박영호이현필 등의 스승이다. 다석(多夕)은 많은 세 끼(多)를 다 먹지 않고 저녁(夕) 한 끼만 먹는다는 뜻이다.[출처 필요]

 

출생과 성장

1890년 3월 13일 서울 숭례문 인근에서 아버지 류명근과 어머니 김완전 사이에 맏아들로 태아났다. 5살때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6살때 홍문서골 한문서당에 다니며 통감을 배웠다. 10세에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다니고 다시 한문 서당에 다녔다. 12살때부터 자하문 밖 부암동 큰집 사랑에 차린 서당에서 3년 동안 맹자를 배웠다.

 

기독교 신앙에 귀의

15세에는 YMCA 한국 초대 총무인 김정식의 인도로 개신교에 입문하여 연동교회에 다녔다. 경성일어학당에 입학하여 2년간 일본어를 공부했다. 1909년 경기도 양평의 양평학교에서 한학기동안 교사로 일하였다. 1910년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하였다. 1912년에는 기독교 사상가요 문인인 톨스토이를 연구하여 그 영향으로 기성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의 짧은 소설들(바보 이반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에서 드러나듯이,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교회에 나가는 종교행사의 충실한 참여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삶과 복음을 이웃에 대한 자비, 정직한 노동양심적 병역거부, 악을 선으로 이기는 비폭력투쟁등으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이해했다. 일본 도쿄에 가서 도쿄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결혼과 YMCA활동

1915년 김효정과 결혼하였고, 이후 최남선과 교제하며 잡지 《청춘》에 '농우', '오늘'등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때에 이승훈이 거사 자금으로 기독교 쪽에서 모금한 돈 6천원을 아버지가 경영하는 경성피혁 상점에 보관하였다. 후에 이것이 적발되어 압수당하였으며 류영모 대신 아버지 유영근이 체포되어 105일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1년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일년간 재직하였다. 1928년 YMCA의 연경반 모임을 지도하기 시작하여 1963년까지 약 35년간 계속하였다. 1928년 이전에는 아버지의 경성피혁상점의 일을 도왔는데, 이후로는 아버지 유명근이 차려준 솜공장인 경성제면소를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잡지 《성서조선》에 기고를 하였으며 이 일로 1942년 일제에 의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57일 만에 서대전 형무소에서 아들 의상과 함께 풀려났다. 해방 후 행정 공백기에 은평면 자치위원장으로 주민들에 의하여 추대되었다.

 

생애와 사상

정인보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기도 했던 류영모는, 1921년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나 이후 은퇴하여 농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기독교를 한국화하고 또 유, 불, 선으로 확장하여 이해했다.[1] 그의 강의중 일부는 제자들에 의해 남아 있고, 해설과 함께 나오기도 했다. 강의들은 순우리말로 되어 있으나, 기발한 표현이 많고 함축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학자들은 류영모의 종교다원주의가 서양보다 70년이나 앞선 것에 놀라고 있다. 그의 종교사상은 1998년 영국의 에든버러(Edinburgh)대학에서 강의되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종교다원주의라 말하나

일원 다교주의가 맞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들었습니다.

비록 재림 그리스도나 어머니하나님을 깨닫지는 못하였으나

몸은 썩어질 것이요, 얼(영혼)은 영원한 것이라,

자신을 비 정통이라 말하였으나

오히려 기존의 기독교단체보다는 훨씬? 정통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