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맘울파

안도현의 시, 오래된 우물과 연탄 한 장 본문

일상/좋은 글 좋은 말

안도현의 시, 오래된 우물과 연탄 한 장

물수제비 2021. 9. 14. 19:43

깊게 다가오는

안도현의 시, 오래된 우물과 연탄 한 장

 

 

 

오래된 우물

 

 

 

 

고여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살을 뚝뚝 떼어' 와

'철철 피 흘려주는' 은

십자가의 희생 예수님의 사랑을

소환한다.

내주고 내줘도 끊임없는

그윽한 사랑이

참 아프게 고마운 가을 밤이다.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을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좋은글 좋은생각에서 옮겨 옴

 

 

'기꺼이 활활 타오르고

기꺼이 자신을 산산이 으깨는 일'

그것이 참 멀리 서서 나를 부른다

거기에 닿을 수나 있을까